이방인 |
이방인은 발표 당시 실존주의 문학으로서 샤르트르에게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뫼르소라는 인물은 타성에 젖어 아무런 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무의미하고 똑같은 지루한 삶이 연속이다.
물론 지루함이란 단어는 독자가 가지는 느낌일 뿐이지만
그는 삶에 저항 없이 그냥 단순히 순응하며 육체의 피곤함 만을 느낀다.
파리 발령을 낼때에도 그는 생활의 변화를 싫어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삶에서 자신의 일만을 완수하며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조차도 뫼르소에게는 의식이 없다.
단지 피곤하고 졸릴뿐이라고
뫼르소는 말한다. 생활이란 절대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며 어쨌든 모든 생활은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고
심지어 마리의 청혼조차도 결혼하려는 이유, 사랑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뫼르소는 육체의 피곤함이 중요하다.
어머 니이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았고,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마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그런 그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살해한 것은 일반적인 눈으로 봤을 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자이다.
자신의 정당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단지 태양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뫼르소를 법정에서는 사형을 언도한다.
사형수로 있으면서 뫼르소는 생각을 한다.
사형이란 제도 감옥이란 곳 재판 이런 것이 합리적인가 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뫼르소가 행한 행동을 파렴치한 행동으로 몰고 가는 재판과정
뫼르소의 생각은 빠져 있고 변호사와 검서들의 논거 속에서 벌이는 재판에 뫼르소는 당혹감을 느낀다.
얼마나 부조리한가
재판이란 정당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감옥이란 곳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감옥이 죄수의 자유를 박탈한다고 하지만 감옥에서 살다 보면 그 생활에 적응해서 살게 마련이고 더 이상의 자유 박탈의 의미는 없어진다.
죽음, 죽임으로써 벌한다고 하지만 죽으면 끝이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벌인가
뫼르소는 사형수로 있는 감옥에서 이런 통찰을 통해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가 생의 종말에서 왜 약혼자를 가졌는지 왜 생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저기 역사. 생명이 스러져가는 그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울한 휴식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도 죽음에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어머니는 거기에서 해방된 자신을 느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는 준비를 했던 게 틀림없다. 아무도 그 아무도 어머니에 대해서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는 것이다.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갈 용의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불행에서 나를 건져주고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 것처럼 나는 이 징후와 별들이 가득 찬 이 밤 앞에서 처음으로 이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가득 찬 마음을 열었다. 이 세계가 이렇게 도 나와 비슷하고 마침내는 형제와 같이 느끼게 되니 나는 행복했었고 또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성취되고 내가 고독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려면 내 사형이 집행되는 날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나를 증오에 찬 고함소리로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만 남았다.
-----------------이방인 마지막 글 중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서 깊은 통찰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서 뫼르소의 세계는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
존재 자체부터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
뫼르소의 인물도, 법 제도도 그리고 사형제도도 그런 모든 것들이 부조리하다.
세계 자체가 부조리하다.
그것을 죽음 앞에서 깨닫게 되면서 만약에 살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린다.
우리의 존재 왜 존재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존재 자체 하나만으로도 이미가 있다. 부조리한 삶이지만 말이다.
존재가 있는데 그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부조리함을 느끼고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 있음과 그 의식의 깨어있음 -의식의 깨어있음은 부조리 함을 알고 그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존재하면서부터 부조리한 삶에 살게 되고
그렇다면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데
삶과 죽음 존재 자체가 부조리한데 그렇다고 죽음을 택하는 건 어떤 행위조차 하지 않는 무의미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죽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보자.
태양의 의미
이방인의 작품에서 태양이 중요한 일을 한다.
태양이 많이 비취는 알제리 태생이라 태양에 많은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싶다.
태양은 뫼르소가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는 무거운 중압감의 태양이었다면 장례식을 치른 후 마리를 나갔을 때의 태양은 환하다
태양이 때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뫼르소에게 작용한다.
아랍인을 죽였을 때도 태양이 작용한다. 태양에 비친 칼날이 번뜩임에 뫼르소는 균형을 잃고 만다.
태양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을 숨기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하고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정오의 태양의 존재는 명확성 왜곡시키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을 까뮈의 전락과 같이 고민해도 좋을 듯하다.
전락의 클라망스는 뫼르소와는 다른 인물이다. 비교 분석해도 좋을 듯하다.
생각해 보기
1. 부조리함이 무엇인가
2. 태양의 의미는 무엇인가
3. 부조리에 항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4. 죽음 자살을 어떻게 까뮈는 생각하는가
5.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까뮈식의 해답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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