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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역사,인물

역사평설 병자호란

by 까만여우 201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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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저자
한명기 지음
출판사
푸른역사 | 2013-10-29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通史● 광범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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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2

저자
한명기 지음
출판사
푸른역사 | 2013-10-29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 광범위한 사료 섭렵을 통해 확보한 학문적 엄밀성과 전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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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역사스페셜을 통해 한명기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어찌나 강의를 명쾌하게 해 주시는지 감동으로 강의를 들었는데

이제야 책을 읽고 정리를 해본다.

우리나라 치욕의 역사 중 하나인 병자호란

우리나라의 역사발전을 뒤처지게 했던 요인 중이 하나

지금껏 병자호란에 대한 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시점에서 반가운 책이었다.

 

1. 인조의 반정의 명분

인조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들어 반정을 도모했다.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를 폐한 폐모살제

궁궐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줌

선왕조의 구신을 몰아내고 모두 쫓아냄

뇌물로 인사를 단행하여 혼양 한 자들이 조정에 넘치게 한점

선조는 명의 재조지은을 잊지못했는데 광해는 배은망덕하게 오랑캐에게 은덕을 베풀었다는 게 요지다.

 

2. 인조의 개혁정치 이념

친명배금의 기치아래

광해군정권에서 죄를 지었던 사람을 모두 석방하고

광해군 시대 토목공사와 관련된 부역 수탈을 일제 폐지하고

광해군이 척신과 권세가들에게 베풀었던 면세조치를 철회

내수사 대군방에서 강탈한 백성들의 토지를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3. 인조반정 후의 정세

북인정권은 몰락했고 반혁명세력에 대한 기찰이 강화되었고

명은 인조책봉문제를 조선을 길들이려는 수단으로 활용하게 된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군사적 역량을 소모하게 되고

정권유지에만 급급하게 된다.

대동법 시행의 경우 중앙관청에 납부할 공물, 왕실에 납부할 공물, 지방관청에 납부할 공물등의  부담을 두 차례 납부함으로써 해소되어야 했으나 지방관청공물과 왕실 진상품을 애초에 누락하는 바람에 또다시 징수하면서 백성들에게 이중부담을 안겨주었다.

 

이런 와중에 정묘호란(1627)이 발발한다.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 명과 후금과의 관계 모문룡의 문제가 얽히면서 홍타이지의 권력강화의 목적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은 금과의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조선에 유리한 카드를 쥐게되는 데 그 카드를 모문룡이 갖게 된다.

사르후전투로 명청교체의 분수령이었는데 누르하치는 군사, 정치 행정 사법의 공동체인 팔기제를 정립한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8남으로 한인포용우대정책을 펼치며 왕권강화를 도모한다.

후금은 인구도 적었고 식량문제도 컸다, 또한 생필품도 적었다.

이에 조선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받고자 했다.

 

4. 모문룡의 죄악

가도에 있던 모문룡의 횡포에 원숭환이 모문룡의 12가지 죄악을 내걸고 처형한다.

병마와 전량을 사용하면서 전혀 감시를 받지 않은 죄

제대로 적과 싸우지 않았으면서도 공을 세워 황제를 속인지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와 내 통한죄

상인들을 약탈하여 장물을 쌓아두고 스스로 도적이 된 지

부하와 여명의 부녀자들을 빼앗아 첩을 삼고

위충현을 아비처럼 섬기고 환관배들과 결탁한 죄

진을 연지 8년이 지났어도 한치의 땅도 얻지 못한 죄 가 그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원숭환도 죽게 되면서 명은 자멸의 길로 접어든다.

이런 명과는 대조적으로 후금을 은 귀순투항한 사람 한족출신들을 우대중용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한다.

 

5.정묘호란 이후 정세

정묘호란이후 조선은 중국 일본의 물자를 후금에게 공급하는 중계자의 역할을 당당하게 되고 후금은 농경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게 된다.

후금과의 교역으로 과일은 귀하게 된다.

후금이 요구한 물자에 각종서적을 요구하는데 이런 서적들을 통해 후금은 체제를 정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후금과의 개시도 후금은 상시 개시 연 3회 이상 개시장소도 중강 회령을 요구하는 등 자주 마찰을 빚게 된다.

후금이 착착 체제정비를 하는 동안 인조은 생부의 추승논란을 일으키고 생모가 죽음으로 상복문제로 10년을 허비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상대적으로 수군의 병력이 낮았던 후금은 조선에 배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때 명의 수군이 후금에게 투항함으로써 후금은 수군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6. 병자호란 발발

수군까지 장악한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는데

조선은 청군의 철기야전에서 정면으로 승부할 경우 승산이 없다는 것을 보고 산성에서 진을 치게 되는데

청은 산성을 거치지 않고 대로를 달려 곧바로 서울을 장악하게 된다.

대로를 막은 병사들이 없었다.

빠르게 서울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조가 피란할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강화도에 피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련했지만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상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화도로 피란 갔더라면 어땠을까

홍타이지는 수군을 장악했다.

봉림대군등의 왕실 가족을 먼저 강화도로 보냈는데 홍타이지는 조선이 강화도로 갈 것을 예상하고 수군을 키웠기에 강화도도 빠르게 점령했다.

남한산성의 인조는 고립되었고 삼배구도구로 항복을 한다.

 

7. 병자호란 이후 정세

청은 신료들을 길들이기 위해 고위신료들의 아들이나 조카를 질 자로 보내는 것을 요구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볼모로 요구하고

삼학사들 화친을  방해하는 자들을 처형한다.

반정신료들을 직접 징치 하면서 공표를 유발한다.

병자호란을 통해 많은 백성들이 후금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인조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쳐 나온 사람들을 다시 돌려보내거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도망쳐와도 조선에서 살 수 없는 백성들의 슬픔

속환으로 돈을 내고 포로에서 석방되어 나온 사람들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애화 돼버리고 여성은 실정이라는 굴레를 씌워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혼등의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조성에서도 큰 문제화되었다.

인조는 아무런 대처도 못하면서 정권유지에만 급급한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런 와중에 1642년 명의 이부상서 홍승주가 청으로 투항하면서 홍승주의 부하들이 조선과 밀통했다고 폭로하면서 사건이 커지게 된다.

이 사건에 소현세자가 적극참여하라고 하고 인조는 이 사건에서 이조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고 소현세자를 의심하면서 아들을 정적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지위박탈 강빈 사사 등을 거치면서 권력유지에 힘쓴다.

 

7. 마무리

강대국사이에 있는 조선의 모습

광해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강대국사이에서 살길을 모색하려 했다.

선조의 광해에 대한 불만은 불행의 씨앗을 마련했고

광해는 완전히 국정을 장악하지 못한 채 무리한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폐모를 하는등의 실정을 한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등극을 하지만 자신의 개혁정치를 실현하지 못한다.

나라밖의 시정에 대해 어두웠으며 대동법등의 시행도 하지 못했고

군력도 강화하지 못한채

광해가 계속 집권을 했더라면

소현세자가 급사하지 않고 왕위에 올랐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세계를 읽어내지 못하고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내실을 기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명할 수밖에 없다.

우물 속에 개구리는 더 이상 안된다.

세상을 향해 뛰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 힘은 내 안이 튼튼해야 한다.

우리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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