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보고서를 우리는 흔히 하멜 표류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어보면 표류기의 성격보다 보고서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서기였던 하멜이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만 13년 만에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억류기간 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쓴 보고서다.
1968년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엣 <스뻬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면서 유럽 각국에 번역 출판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럽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정확하게 소개한 최초의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1917년 재미교포 잡지안 <태평야>에 연재되었던 것을 육당 최남선이 <청춘> 잡지에 전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하벨 보고서거 처음 소개되었다.
1653년 8월 16일부터 1666년 9월 14일까지 제주에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기까지 겼을 닐과 조선의 풍습 위치등에 관해 기술한 보고서다.
이 책에는 1626년 얀 얀스 벨터 프레이 한국명으로 박연이라는 네델란드인이 1626년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폭풍으로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에서 개명하면서 적응해 살고 있다는 것과
조선에 살면서 거의 모국어인 네델란드어를 잊고 살아 처음에 통역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기술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하멜일행을 단순한 기술자로 여기고 박연처럼 그들을 중용하지 않은 까닭은
일본에 대한 회유정책과 청과의 외교적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하멜일행이 조선을 탈출하고 잔류한 나머지 일행을 나가사키로 송환하는 문제에 대해서
일본 조선의 양국의 외교적 문제가 개입되어 있던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네덜란드와의 외교에서 독점하기 위해 조선을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멜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우리 조선이 하멜일행에게 어떤 대접을 했는지를 보면
그들이 살 수 있게 살아가게끔 지원을 한 것을 보면
청 일조 이 세 나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원칙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 때문에 하멜 일행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에 박연과는 시쿳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일도 하는 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의 능력을 십 분 활용했던 것에 비해
하멜 일행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 시기의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적극적 교역으로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중심으로 근대회의 물꼬를 튼 것에 비하면 상당한 아쉬움이 존재한다.
하멜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가 상당히 많았고
학업에 대한 의욕이 컸으며
그 당시의 풍습 처벌 군대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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