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익산미륵사지 (자적 150호)
미륵사지는 배제 30대 무왕이 세운 사찰로 익산의 주산인 미륵산(용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를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등을 곳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는 창건설화가 있다.
198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3년 미륵산 사자암 발굴조사에서는 백제 및 통일 신라의 기와와 토기 '지치 2년 사자사조'와 암막새가 출토 되어 삼국유사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할 목적으로 조성한 동양 최대 국립사찰로서 조선후기 17세기 무렵에 폐사되었다,
미륵사의 초창가람인 무왕대의 가람은 중문, 탑, 금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중원과 이를 둘러싼 회랑 그리고 중원의 그것과 비슷한 금당과 탑을 중원의 동쪽과 서쪽에 배치한 삼원병립식 가람으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미륵사는 3 탑 3 금당 3회랑의 가람배치로 1 탑 1 금당의 기본구조에 동서로 건축물을 따로 붙여 규모를 확대해서 간결하다
익산미륵사지 금동향로(보물1753호 통일신라)
거의 완전한 형태로 출초되었다,
중국 당의 외래적인 요소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동향로의 뚜껑에 새갸진 8 엽연화문이 우리나라 수막새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세련된 연화문을 그대로 살려낸 듯하다.
익산미륵사지석텁(국보11호)
14.M의 높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석탑이다.
미륵사지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나무 대신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에 한국석탑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다.
낮은 기단 위에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운 탑신을 쌓았으며 기둥은 밑이 넓고 위가 좁아 ㄷ안정감이 있다.
1층에는 사방으로 출입구를 내었고 내부의 중앙에는 중심기둥이 탑신 전체를 받치고 있다.
탑의 기둥, 벽면, 처마 지붕 등의 전체적인 형식과 외형적인 모습은 목조건축과 비슷하여 지붕은 평탄하고 끝에서는 곡선을 이루면서 살짝 위로 들려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는 6층만 남아있다.
원래는 동측과 서측에 똑같은 탑이 하나씩 있었는데 동탑은 사라지고 서탑만 있다.
관새음응험기
백제 무광왕 즉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였다.
정관 13년 기해년(639) 11월 하늘에서 큰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려 제석정사가 화재를 입어 불당, 칠 급부도(7층목탑) 낭방(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탔다.
탑 초석 안에는 여러 가지 보석 7보와 불사리 채색 수정병과 동에 금강반야경을 새긴 사경과 이를 담은 목 칠함이 있었다.
초석을 열어보니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과 칠함만 예전과 같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정병은 안팎이 모두 보이지만 뚜껑을 열 수 없었고 사리는 모두 없어져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왕에게 사리병을 가져가니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참회한 후 병을 열어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안에 있었다.
밖에서도 6개의 사리가 모두 보였다.
이에 대왕과 모든 궁인들의 신심이 배가하였다.
공양을 올리고 새로 사찰을 지어 사리를 봉안하였다.
고도리 석불입상
2.왕궁리유적(사적408호)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용화산 남쪽 끝 해발 10 내외의 구릉에 위치한 왕궁리 유적이 백제의 궁성 터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대동지지> 김정호 <익산별도> 기록과 <관세음응험기>(일본 철련원벌견)의 백제무왕 지모 밀지 천도 기록이 왕궁리 유적의 소재지명인 왕궁면의 왕궁과 연관되어 백제의 무황 호근 보덕국의 안승, 후백제의 견훤이 경영하였던 왕궁터로 인식하였다.
왕궁리 유적은 평지성 구릉에 남북 492M 동서 234m, 폭 3M 내외의 궁정을 두른 후 내부에 경사면을 따라 4단의 석축을 쌓고 평탄지대를 조성하여 정무공간과 생활공간, 후원공간을 배치한 궁성유적이다.
궁성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탑-금당-강당으로 구성된 1 탑 1 금당식 사찰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되었고 그 중심부에 5층석탑이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전각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 백제의 자연친화적인 조경기술을 보여주는 정원시설등의 궁성 관련 유구가 밝혀지고 전 달린 토기, 8 엽단판연화수막새와 인장 와(수부, 명기와 등), 유리, 금제품등 10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시대의 공중화장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 학습지
이 학습지는 왕궁유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무왕-삼국유사의 무왕편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재주와 도량이 많았다.
마를 캐다가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이 노래가 궁궐까지 퍼져 공주는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왕후는 순금 한말을 여비로 주었고 유배길에 서동이 나와 맞이하여 정을 통했다.
백제에 도착하여 금을 보이니 서동이 이것과 같은 것이 마를 캐는 곳에 많다고 하였다.
공주는 이 말을 듣고 궁궐로 옮기자고 하여 금을 모아 용화산 (지금의 익산) 사자 사 지명법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신통력으로 금을 운반해 신라의 궁궐에 가져다 놓았다.
무왕이 행차하여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와 경의를 표하며 이곳에 절을 짓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미륵 법상 세 개와 회전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훨씬 전의 동성왕의 이름이라는 설이 훨씬 유력하다.
시기적으로 무왕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이야기다.
서동이 마를 팔고 다녔다는 것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가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백제 지역의 미륵신앙이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를 가보면 그 절이 얼마나 큰절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미륵사는 3 탑 3 금당의 형태로 지금은 서탑만 있다.
양쪽에 화강암의 석탑과 중앙에는 목탑이 있었다 한다.
당간지주가 5개나 있어 상당히 큰절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곳 미륵사는 근처 왕궁리와 가까이 있어 무왕이 왕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과
그곳에는 금을 다루는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유사이 이편에서 보듯 금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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